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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이야기

한번에 알아보는 필리핀의 역사, 고대부터 호세리잘, 현재의 필리핀까지

by 웨더맨 2024.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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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알아보는 필리핀의 역사, 고대부터 호세리잘, 현재의 필리핀까지

 



푸른 바다, 보홀, 팔라완, 보라카이, 맛있는 음식 등으로 유명한 
필리핀의 역사와 특징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볼까 합니다. 
인구수는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2021년을 기준으로 세계인구 랭킹 13위 국가로는 
약 1억 1000만 명의 필리핀이 랭크되었습니다. 
필리핀은 적도에 약간 북쪽 아시아 대륙 남동쪽의 서태평양에 산재하는 7000여 개가 넘는 
섬들로 구성된 군도 국가로 북부의 루존 중부의 비사야 남부의 민다나오 크게 세 지역으로 분류됩니다. 
면적은 약 30만 제곱킬로미터로 대한민국의 세 배 정도의 크기입니다. 

필리핀의 수도는 루존섬 남서부에 있는 마닐라로 16세기에서 19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 때부터 필리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고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활기 있는 서구식 도시가 되었으나 태평양 전쟁 말기에 격전지가 되면서 
당시의 시가지가 상당 부분 파괴되었습니다. 
마닐라의 역사는 그리 짧지 않지만 전쟁의 상처로 인해 필리핀 고유의 문화를 느끼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인식으로 현대사회의 관광객들에게는 마닐라보다는 
고급 휴양 리조트들이 있는 세부가 더 인기가 높습니다. 
비록 해외 관광객들에게는 세부 다바오가 인기가 높지만, 
마닐라는 수도인 만큼 경제 산업의 중심지로서 시의 남동쪽에는 공업지대가 형성되어 
철강 화학이 발달했고 북항, 남항이 있으며 
시 남부의 국제공항으로 인해 교통이 활발합니다. 

필리핀의 민족 구성은 타갈로고인 세부아노인 그리고 일로카노족 비사야족 등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필리핀의 1인당 GDP는 2021년 기준 약 3600달러로 볼리비아와 비슷한 수치로 
세계 120위 정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필리핀의 역사의 고대 문명은 시작에 있어 명확하게 
제시할 만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16세기에 접어들어 스페인을 비롯해 대외 세력이 필리핀 지역에 
침투하기 전의 역사는 흔히 고대 문명으로 통칭되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필리핀 지역의 기본적 통치 형태는 바랑가이라는 족장 지배 체제를 갖추고 있었는데, 
바랑가이는 대개 30 에서 100가구 정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큰 규모의 바랑가에는 2000명 이상이 살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마닐라와 세부 같은 
지역들이 있었으며 바랑가에는 독자적 지배자인 다투가 존재했습니다. 

다투는 최고의 행정권자이자 군사 지배자로서 대부분의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마을에 중대사를 결정할 때면 원로들의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고대 이 필리핀에서는 오스트랄로이드 계열의 네그리터라 불리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차츰 여러 이민족들이 드나들었습니다. 
7세기부터 일부 섬 지역들이 근처에 스리 위자야 왕국의 지배를 받기 그 영향으로 
힌두교 문화와 불교 문화가 필리핀에 전파되었습니다. 
1989년 라구나주 바랑가이에 있는 룸방관 근처에서 노동자들에 의해 라구나 동판 비문이 발견됩니다. 
이후 네덜란드의 인류학자 안튼 포스트마가 라고나 동판 비문을 해석하면서 
당나라 이전 시대부터 북부 루선 지역이 중국과 교역을 했다는 기록이 검증되었습니다. 

루존 섬에 사는 다양한 국가의 사신들이 중국의 조공을 바치거나 
혹은 무역을 하는 와중에 경유한 경우가 많아 자연스럽게 무역항으로 발전했습니다. 
루손에서는 많은 인종들이 오갔고 중국인들이 필리핀 제도를 경유해 인도와 아랍인들과 
교역하기 원했기 때문에 당시부터 마닐라에서는 차이나타운이 생겼습니다. 
또한 일본인들도 루선섬 북부와 마닐라의 교역을 펼치는 등 문명과 별로 접촉하지 못했던 
필리핀의 원주민 집행 집단들도 다양한 국가들의 상업 집단들을 접하며 변화를 맞이합니다. 
그러다 필리핀에서는 11세기가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가진 세력들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톤도 마닐라 부투안 등의 상업 왕국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15세기 무렵 소수의 아랍인들이 필리핀에 영구 정착하면서 이슬람교가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필리핀 남쪽의 순루제도 및 말레이시아 일부에서는 순루 술탄국이 세워졌습니다. 

홀로를 수도로 한 순류 술탄국은 전성기인 말라카 브루나이를 포함한 말레이계 국가들과의 
교육을 통해 부를 축적해 갔고 비슷한 시기에 마긴다나오 술탄국 마닐라 왕국 등의 
이슬람 도시 국가들도 나타납니다. 
필리핀은 점차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들의 세력이 확장되어 가고 있는 듯했으나, 
16세기 중반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필리핀을 발견하게 됩니다. 
포르투갈 왕국 출신의 항해사로 스페인에 귀화한 후 왕실의 후원을 받아 
세계 일주 항해에 도전한 마젤라는 세계 일주를 마치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1519년 마젤라는 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해 그동안 인류가 가로질러 본 적이 없는 
바다를 건너며 고요하고 넓은 바다에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다섯 척의 배와 270명의 선원으로 스페인을 출발한 마젤라는 오랜 항해 끝에 
선원들의 불만으로 반란을 마주한다던가 굶주림과 괴열병과의 사투를 겪으며 
1521년에 필리핀에 도달합니다. 
마젤란은 세부섬에서 부족 통합국을 다스리던 국왕 라장 후마봉과 의형제를 맺은 뒤 
막탄섬 지배를 두고 경쟁했던 라플라풀을 죽이겠다고 약속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50여 명의 스페인인과 세부인 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막산섬에 쳐들어간 
마젤란은 준비된 1500여 명의 부족 전사들에게 패배하여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로 인해 마젤란은 죽게 되었지만 살아남은 선원들이 항해를 멈추지 않고 
인도양을 거쳐 세계 일주는 완성하게 됩니다. 
마젤란의 스페인은 필리핀이 무역기지로 최적의 지역이라고 판단하였고 
본격적인 식민화 작업에 착수하게 됩니다. 

 



마젤란이 죽고 난 뒤 스페인은 세네 번의 원정대를 보내는데 
세부의 맹주였던 라프라푸 족장에 가로막혀 번번이 실패하다가 
35년이 지난 1565년 미겔 로페제델 레가스피의 원정대가 세부섬 상륙에 성공하여 
필리핀 도덕령을 설립했습니다. 
이후 스페인은 연전 연승을 거두며 1571년에는 마닐라 왕국을 멸망시키며 
스페인이 필리핀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스페인은 이곳을 통해 상업적으로 일본인들과 
단기간에 가깝게 지냈는데 이는 당시 일본에서는 전국식 시대를 끝내고 
도쿠카와 막부가 들어서며 쇄국 정책을 취하여 무역에 타격을 입은 영향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페인은 기존에 필리핀 내 경제권을 갖고 있던 이슬람 세력과 중국인들과의 갈등이 심해지다 
몇 차례의 전투를 겪으며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이후 필리핀에 정착한 화교들은 가톨릭을 믿게 되고 
스페인계 및 토착 기득권층과 통혼을 하며 
스페인 주도 아래 여러 민족이 살아가게 됩니다. 

18세기 말 스페인은 필리핀에서 플랜테이션을 시작했고, 
현지 혼혈인인 메스티소가 대농장을 경영하게 되는데 메스티소 중 부유한 사람들이 생기면서 
스페인어로 배운자 지식인을 뜻하는 일료스트라도라는 계층이 생겼습니다. 
19세기에는 청나라 사람들이 스페인형 필리핀의 대거 이민을 오면서 
중국계 혼혈이 많이 생겨납니다. 
마닐라항이 기양되고 플랜테이션이 더욱 확대되어 가며 일류 수출로 브라도스 계층은 
자신들을 스페인 사람과 동등하다고 여기며 원주민들을 인디오스라고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류스트라도스 계층은 자식들을 스페인으로 유학 보내며 스페인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지만, 
스페인에서는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였고 이에 일레스트라도스 계층은 분노하며 
필리핀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필리피노스라고 자칭합니다. 
한편, 남부의 무슬림들은 스페인에 지속적으로 저항했지만, 
이들의 저항은 스페인에 대적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조직적인 저항으로 발전하며 
19세기에 들어서는 일루스트라도스와 함께 외세에 대한 반발을 더욱 적극적으로 표출하였습니다. 
필리핀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호세 리잘은 1892년부터 필리핀 독립운동의 지도 기관인 
필리핀 민족 동맹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지휘합니다. 
그를 주시하고 있던 스페인 정부는 1896년 이자를 체포한 후 민디나우섬 다피탄으로 유배시켰습니다. 
유배지에서 리잘은 자신의 전공인 의학을 살려 진료소를 만들어 
무료로 섬의 주민들을 치료해주거나 현지 청소년들에게 기본적인 소양과 애민 사상을 교육시켰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정부는 무장 독립 투쟁의 배후라는 명목으로 리자를 체포하였고 
마닐라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는 변호사 없이 스스로를 변호했으나, 
총살령을 선고받아 사망합니다. 

비잔의 죽음은 필리핀인들에게 독립 의지를 불지르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많은 청년들이 필리핀의 독립 투쟁에 간함하여 결과 필리핀 제 일 공화국이 선포됩니다. 
1898년 필리핀은 300년이 넘는 스페인의 지배 끝에 드디어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하지만 필리핀 제 일 공화국은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되는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민주주의 국가란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배층만 달라졌을 뿐 
일상에서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한편, 세계 정세에서는 1898년 4월부터 쿠바섬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인 미서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로 장식하여 세계를 무대로 새로운 강대국으로 급부상하였고 
스페인 세력을 아메리카에서 축출하였지만 
미국은 카리브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아시아의 전진 기지로 필리핀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미국이 필리핀에 도착하기 전에 필리핀은 독립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세력을 팽창하고자 했던 제국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필리핀의 상황은 큰 문제가 되지 필리핀인 60만 명을 학살하며 
필리핀인 60만 명을 학살하며 필리핀을 차지하게 됩니다. 
필리핀은 새로운 미국의 식민 지배하에 정치 및 행정체계가 급속한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울러, 영어를 널리 사용하도록 교육 체계를 개선하고 
전국이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1898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군정기는 얼마 후 민정으로 전환하였고 1912년 우드럴 윌슨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의 민주당 정권은 필리핀 독립에 긍정적이었습니다. 
1935년에는 필리핀 자치령이 수립되며 필리핀은 미국으로부터 독립 준비를 시작했지만,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1941년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략하였고 
필리핀 사람들은 저항했지만, 전쟁 도중 100만 명이 사망하게 됩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이 다시 마닐라를 점령했고 
1946년 필리핀은 미국의 승인 아래 완전 독립에 성공합니다. 
한편, 일제에 투쟁해오던 필리핀의 공산주의 단체인 후쿠발라업은 
이 독립은 독립이 아니라 주장하였고 토지개혁 등을 요구 및 반미 무장투쟁을 개시합니다. 
하지만 독립 이후에도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지속하던 자유당은 국방장관이었던 
라모 막사이사의 대통령을 내세워 이를 진압했습니다.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우익적인 행보를 이어가 이때의 별명이 태평양의 아이젠하워로 불리우며 
필리핀의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필리핀의 명성로는 보라카이의 화이트 비치와 팔라완 엘린도의 낙판 비치를 꼽을 수 있습니다. 
화이트 비치는 보라카이를 대표하는 비치로 그림같이 아름다운 물빛과 새하얀 모래 말 그대로 
휴양지의 천국과 같은 곳이라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곳은 산호가 부서져서 만들어진 백사장으로 이름의 특징대로 
새하얀 모래 빛깔과 함께 감촉 또한 부드러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낙판 비치는 3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화이트 비치의 에메랄드빛 바다로 유명합니다. 
시원하게 뻥 뚫린 전망 드넓은 비치 눈이 시리도록 맑고 
파란 바다의 특징으로 인해 멀리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비치입니다. 
필리핀 마닐라 여행을 하는 데 있어 현지인들에게 사랑받는 
리잘 공원은 독립운동가이자 의사 교육자였던 호세 리잘이 채용되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리잘공원의 면적은 58 핵탈르 약 17만 평에 달하는 면적으로 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심 공원 중 하나입니다. 
마닐라만의 동부 해안에 자리한 리잘 공원은 필리핀의 역사를 형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896년 12월 30일에 집행된 필리핀의 독립 영웅 호셀 리잘의 사형은 
스페인에 맞선 필리핀 혁명을 촉발했습니다. 

이 공원은 공식적으로 그를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졌으며 
그의 유해를 안치한 기념물은 공원의 상징적 거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기념비 안에는 실제 호세 리잘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어 현재도 호위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30미터쯤 떨어진 곳에 호세 리잘의 촬영장이 있는데, 
리잘이 남긴 시와 당시의 천형 장면이 화강암 위에 부조로 새겨져 있어 
방문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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