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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고려거란전쟁 서희의 강동6주 담판 이야기

by 웨더맨 2024.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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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서희의  강동6주 담판 이야기

 

 

10세기 초 동아시아는 대혼란의 시기였습니다.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자 중국은 여러 나라로 분열됐습니다. 
이른바 5대 십 국 시대라 불리는 난세의 시작이었습니다. 
5대 십 국 시대는 이후에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50년 넘게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혼란을 틈타 급부상한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거란족이었습니다. 
유목민족이었던 거란족은 분열됐을 때는 큰 위협이 안 됐지만 
한 번 단결하며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유목민족은 말 다루는 것에 익숙해서 따로 훈련할 필요도 없이 
전시때는 바로 최강의 기병이 됐습니다. 
여러 부족으로 나뉘었던 거란족을 통일한 인물은 야유라 복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키가 이 미터가 훌쩍 넘었고 300 근짜리 활을 당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합니다. 
거란족을 통합한 야유라 보기는 급속도로 영토를 넓혀서 
거란이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급기야 926년 발해마저 공격해 멸망시켰습니다. 
발해 유민들은 압록강 유역에 정황국을 세워서 저항을 이어갔지만 
거란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거란은 북방의 유목민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거란족이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936년 후진의 석경당이 스스로 황제에 오르기 위해서 거란족을 끌어들인 것이었습니다. 
석경당은 대가로 거란을 아버지의 나라로 모시고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실 정도로도 과한 보상이었지만 석경당은 이를 넘어서 미친 제안을 하게 됩니다. 
바로 중국 북부의 연운 16주를 거란에 넘겨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운 16주는 거란의 영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생상력과 인구를 자랑하는 알토랑 같은 땅이었습니다. 
게다가 만리장성 이남에 오늘날 북경까지 아우르고 있어서 
여차하면 거란이 중국 통일을 노릴 수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거란이 이 제안을 수락해 5만의 지원군을 파견했고 덕분에 
석경당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후진이 거란을 배신하려고 하자 
거란은 공격을 감행해 후진을 멸망시켰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중국 전체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거란은 연운 16주를 차지하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아직 중원을 다스리기에는 역량이 부족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여는 16조를 차지한 것도 대단한 성과여서 거란은 이곳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최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때마침 발해가 거란에 의해서 멸망하자 
고려는 발해 유민뿐 아니라 여진족과 거란족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고려 인구는 600만에서 700만 정도로 토지에 비해 
인구가 부족해서 황무지를 개간하려며 더 많은 농민이 필요했습니다.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고려라고 할 정도로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으려는 열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평양이 서경을 발판으로 북진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런 왕건의 눈에 거란의 존재는 눈에 가시었습니다. 
게다가 거란이 동조 국가인 발해를 멸망시키자 왕건은 거란을 철저히 적대시했습니다. 
942년 거란은 사신을 보내 낙타 50 마리를 선물했습니다. 
왕건은 거란 사신을 입에 보내고 낙타는 굶겨 죽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다행히 한동안 양국 간에는 큰 충돌이 없었습니다. 
거란은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송나라를 상대하였고 
양국 사이에는 여진족과 정안국이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서였습니다. 덕분에 고려는 내정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고려사는 왕과 호적 간의 세력 다툼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아직 왕권이 약해서 지방 호족들의 입김이 셌습니다. 
그래서 왕건은 지방 호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정략 결혼을 사용했습니다. 
왕건은 각 지역의 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어서 무려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식을 뒀습니다. 이렇게 왕족이 많아서였는지 
고려 쪽이 왕족 사이에는 근친혼이 성행했습니다. 
이복남매와 사촌끼리 결혼하는 건 흔했지만, 
그래도 친남매끼리 결혼하는 건 금기였습니다. 
하지만 고려 중역부터는 
유학의 영향으로 왕실 내에서의 근친혼의 풍습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왕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족들은 여전히 왕실을 우습게 여기면서 
사병까지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고려가 중앙집권체제를 갖추려면 먼저 지방 호적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긴 인물이 고려의 네 번째 왕인 광종이었습니다. 
949년에 즉위한 그는 호적과 신하들을 대거 숙청했습니다. 

15년에 걸친 피해 숙청으로 수천 명이 희생됐고 
공신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목숨을 부지했다고 합니다. 
계속된 호족 억압 정책은 효과가 있어서 팽팽했던 힘의 균형은 
점차 왕실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리고 6번째 왕이 성종 때에 가서야 
겨우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성종은 여러 개혁을 통해 나라의 제도를 확립했고 군을 강화했습니다. 
그래서 성종은 나라의 기태를 마련한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종의 여동생들이었습니다. 성조에게는 두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성종 이전의 왕이었던 경종의 왕비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헌혜왕후와 헌정왕후였습니다. 
이 중에서 언니였던 헌혜왕후는 이후 천주태후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경중이 단명하자 헌혜왕후와 헌정왕후는 졸지에 과부가 됐습니다. 

경종과 헌혜왕후 사이에는 아들이 있었지만 
경종이 죽었을 때는 아직 너무 어린 두 살이었습니다. 
그래서 헌혜왕후의 친오빠인 성종이 대신 왕위에 오른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헌혜왕후와 헌정왕후가 너무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고려 사회는 재혼에 관대했지만, 
아무래도 이들이 왕후였다. 보니 마음대로 재혼을 할 수 없었습니다. 
화자애들은 평생을 혼자 살기에는 너무 어린 20살도 
헌혜왕후는 김치향이라는 자를 애인으로 뒀는데 그는 중행세를 하면서 
몰래 헌혜왕후와 애정행각을 이어갔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김치양은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얼마 안가 이들의 불륜이 발각되자 성종은 크게 화를 내면서 김치양을 귀양분했습니다. 
동생인 헌정왕후에게도 애인이 있었는데, 그는 삼촌뻘이 되는 왕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사이가 드러나자 성종은 왕옥을 경상남도 사천으로 유배보냈습니다. 

얼마뒤 헌정왕후는 왕욱의 아들인 대량원군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고려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게 될 현종이었습니다. 
하지만 헌정왕후는 대량왕군을 낳다가 죽고 맙니다. 
어린 대량왕군은 궁에서 자랐는데 성종을 보더니, 그의 옷자락을 잡고는 아빠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를 보고 불쌍히 여긴 성종은 그를 귀양지에 있는 아버지와 함께 살게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왕후 또한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대량원군은 어린 나이에 양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자라나게 됩니다. 

한편, 북쪽에서는 5대 십국 시대의 최종 승자가 된 송나라와 거란 간의 타이틀 매치가 벌어졌습니다. 
송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기세를 몰아 두 번에 걸친 북벌을 시도했는데 
두 번 모두 거란에 대패를 당했습니다. 거란이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소태후의 지도력이 있었습니다. 

소태후는 병약했던 경종을 대신해 섭정을 시작했는데 
약 40년간 거란의 실질적 통치자가 됐습니다. 
소태후는 소손녕과 소배 앞 등 여러 뛰어난 인재를 발탁했는데 
이들이 능력을 발휘하면서 거란이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시기 거란은 송나라의 북진을 저지했을 뿐 아니라 고려와 거란 사이에서 
완충제 역할을 하던 정황국을 멸망시켰습니다. 
이제 거란의 다음 목표가 고려가 될 거라는 것 불보듯 뻔했습니다. 
그리고 993년 거란의 소송령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이것이 제 1차 고려 거란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80만이라는 숫자는 거란의 허풍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거란의 총 병력은 100만 정도였는데 장수 한 명에게 
그 정도의 병력을 몰아줄 리가 없어서였습니다. 
그래서 소송룡이 데려온 병령은 많아봤자 10만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거란이 쳐들어오자 고려 조정을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 대단한 성종도 겁을 집어먹고 평양 북쪽의 땅을 거란에 떼어 주는 걸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성종은 평양에 비축해 둔 곡식을 거란에 내어줄 바에는 대동강의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서희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식은 백성의 생명을 지키는 것으로 설령 적에게 빼앗긴다 하더라도 강물에 버릴 수는 없습니다. 
만약 땅을 떼어주고도 저들이 다시 땅을 요구한다며 그대로 다 들어주시겠습니까? 
국토를 떼어서 적에게 주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그들과 싸워보고 다시 의논한다. 해도 늦지 않습니다. 
서희는 3대가 정승을 지내 명문 가문 출신으로 
본인도 어린 나이에 장원 급제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분위기도 항복하는 쪽에서 일단 추세를 지켜보자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성종이 누구를 사신으로 보낼지를 보자 이번에도 서희가 나서서 사신으로 가겠다고 자원했습니다. 
그런데 서희가 거란 진영에 도착하기 직전에 고려군이 안용진에서 
거란군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 전투로 
거란은 고려군의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소손녕은 여전히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서희가 도착하자 소손녕은 자신이 대국에서 온 귀인이니 
서희가 큰절을 해야 한다면서 기싸움을 시작했습니다. 
협상 자리에서 숙이고 들어가는 건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내어주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서희은 끝까지 버티면서 절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한동안 기싸움이 이어졌지만 결국 소손녕이 한 발 물러나 서로 맞절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사실 소손녕은 고려와 전면전을 펼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소손녕이 동원한 병력이 그렇게 많지 않은 데다 송나라라는 강국이 거란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거란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송나라와 고려가 손을 잡고 거란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송령은 고려를 위협해 후방을 안정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치 빠른 서희가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습니다.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자 소송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나라는 신라의 뒤를 이었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것인데 
너희 고려가 옛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다. 
또 우리와 영토를 맞대고 있음에도 바다 건너있는 송나라를 섬기고 
있으니 우리가 너희를 토벌하러 온 것이다. 
그러니 이제 영토를 바친다며 무사할 수 있다. 
서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 고려가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난 나라다 
그래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영토여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금 여진족이 
양국 사이에서 도적질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바다 건너 송나라로 가는 것보다 거란으로 가는 것이 더 어렵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 우리의 옛 땅을 돌려준다며 거란의 조공을 바치겠다. 
원래는 거란의 동경까지 고려 땅이지만 지금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는 땅만 고려에 양보한다면, 
송나라 대신에 거란의 편을 들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거란이 오히려 땅을 내줘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조공을 바친다고 하니 
거란 입장에서도 솔깃한 제안이었습니다. 
결국 소송령은 서희의 제안을 수락해 군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거란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재빨리 
북쪽의 여진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차지했습니다. 
강동 6주는 흥화진 귀주 장흥진 귀화진 곽주 
그리고 안희진으로 고려의 새로운 북방 방어선이 됐습니다. 
 
이후 거란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이 땅에서 큰 피해를 보자 강동 6주를 고려에 양보한 걸 크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서희은 거란군을 철수시켰을 뿐 아니라 강동 6주라는 
새로운 영토까지 얻어냈습니다. 지금까지도 서희가 우리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으로 꼽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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