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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러일전쟁 간단설명 일본이 러시아를 패배시킬 수 있었던 이유!!

by 웨더맨 2024.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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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간단설명   일본이 러시아를 패배시킬 수 있었던 이유!!

 


때는 1895년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동북아의 팽팽했던 세력균형은 
서서히 일본측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청일전쟁 이전부터 이미 서구열강들은 청나라의 광대한 영토를 조각조각 나눠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분할경쟁에 이제 일본까지 참여하며 
청나라는 결국 파행적 세계관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통해 일본은 랴오둥반도와 대만을 획득하게 되었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 또한 더욱 키워갈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더이상 자신들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감을 높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가 일본의 앞을 막아섭니다. 
이들은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강탈한 랴오둥반도를 다시 반환하도록 압박하기 시작했고, 
결국 일본은 대륙진출이라는 온대한 꿈을 접을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삼국간섭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의 진출을 틀어막은 러시아는 얼지않는 항구를 찾아 아래로 아래로 팽창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삼국간섭으로 자신들의 확장을 틀어막은 러시아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분노를 삼키고 있었으며 
일전에 실패한 대륙진출을 다시금 꿈꾸며 폭발적으로 군비를 증강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일본의 북방정책은 상호팽창을 거듭해 나가며 
동아시아에서의 충돌을 맞이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902년 과거 청일전쟁 당시 러시아의 간섭에 이를갈고있던 일본은 이무렵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경계하고 있던 
영국과 손을잡아 영일동맹을 결성합니다. 
영국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의 군함증강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에 나섰고 
영일동맹 이전 해군력에서 일본에게 전반적인 우위를 보였던 러시아는 
점차 일본과의 군함경쟁에서 추격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추격에 위기감을 느낀 러시아는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물리쳤던 과거를 상기시키며 
영일동맹에 대항한 러-프-독 삼각동맹 구상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러시아는 서한을 통해 프랑스와 독일에게 이전과 같은 협력을 제안하였으나 양국의 반응은 소극적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관계이긴 했으나, 프랑스의 주목적은 
유럽의 강자로서 부상한 독일을 견제하기 위함이 더욱 컸으며 궂이 극동지역의 문제 때문에 
영국과 대립할 이유는 없었던 것입니다. 
1902년 프랑스는 러시아의 요청에 따라 동아시아에서의 상호협력을 확인하는 러블공동성명을 발표하였으나 이후 
영국과의 대립각을 세우는것을 포기합니다. 
독일 또한 자신들이 함부로 나서게될 경우 영일동맹에 미국까지 합류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러시아는 주변국의 도움없이 홀로 영일동맹에 맞설수밖에 없었으며 

영국을 등에 업은 일본은 지속적으로 해군력을 증강시키며 러시아를 추격해가고 있었습니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던 양국은 
결국 1903년 상호간 이해관계를 조율하기 위해 교섭을 진행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일본측에 욕심 적당히 부리고 한반도의 북부지역을 중립지역으로 삼자고 제한하고 있었으나 
반면, 일본은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는 만주의 개방을 요구하며 자신들이 북방으로 진출할 통로를 마련해내고자 하였습니다. 
이처럼 러시아와 일본은 서로 각자의 주장만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양국의 교섭은 실패로 돌아갈수밖에 없었습니다. 
교섭이 실패 다다름을 느끼던 일본은 결국 러시아에 대한 강압적 수단으로서 전쟁준비에 돌입하기 시작하였고 
자국의 함대를 한반도로 대거 결집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4년 2월 8일 일본해군의 러시아 함대에 대한 기습공격으로 러일전쟁이 개전됩니다. 
그러나 전쟁초반 만반의 준비를 마쳤던 일본과 달리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전투를 시작한 러시아는 계속해서 패배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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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기습을 시작으로 개전초반 벌어진 리스낭해전 제물포회전 리스낭봉세미포해전에서 
러시아는 연달아 일본에게 두들겨 맞았으며 이후 이어진 전투들에서도 일본이 우세를 보이자 
러시아는 전쟁이 기존예상보다 더욱 오래 지속될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패배를 거듭하던 러시아는 결국 유럽지역에 주둔했던 함대를 극동지역으로 끌어올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 러시아는 이곳 흑해에 주둔중인 흑해함대를 끌고 오려고 하였으나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이 이를 막아서 러시아의 군함이 흑해를 지나는 것은 
흑해 중립화 규정에 의거하여 개전사유에 해당한다라고 주장하며 흑회통과를 방해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투를 위해 훨씬 멀리 위치한 발틱함대를 끌고 갈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러시아의 막강한 발틱함대가 1904년 10월 15 항해를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도 영국은 삼국들에게 러시아를 돕지 말라고 압력을 가하며 
발틱함대가 중간중간 상륙하여 보급을 하는것에 방해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0월 21일 발틱함대가 북해부근을 항해하던 도중 영국의 어선을 일본의 어뢰정으로 오인하여 발포해버린 사건이 발생합니다. 
영국의 언론들은 이에 즉각 반발하며 발틱함대를 미친게 전대라고 조롱하며 비난을 주도했고 
다른 유럽국가들까지 발틱함대 행위를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러시아는 영국과의 관계악화를 피하기 위해 항해를 더욱 지체할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영국함대가 발틱함대 주변을 맴돌면서 시위기동을 감행하고 봉쇄위협까지 가하는 등 극동으로 가야하는 발틱함대 신경을 계속해서 자극시켰습니다. 
결국 영국은 발틱함대가 본인들 소유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것을 거부하기에 이르렀고 
러시아는 결국 이를 악문채 수송함과 낡은군함만 수에즈 운하를 통과시키고 나머지 주요한 전함들은 모두 희망봉까지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05년 1월 9일 발틱함대는 극동으로 향하던 도중 리순함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또 그 무렵 독일의 방해로 인해 항해를 위한 석탄보급까지 지체되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이처럼 장기간의 항해와 열대 무더위 상한음식 질병 등으로 발틱함대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고, 
꾸역꾸역 항해를 거듭한 끝에 1905년 5월 무렵이 되어서야 대한해협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모든훈련 및 전투준비를 마친 일본의 함대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일본 연합함대와 전투를 시작한 발틱함대는 일본해군의 집중포격을 받으며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투결과 발틱함대 38척의 전투함 중 무려 34척이 침몰 및 나포당했고 
일본연합함대는 3척의 어뢰정만이 침몰되는 것으로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러시아를 상대로 지속적인 승전보를 올리고 있었던 일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전쟁과정에 막대한 재정지출로 인해 더 이상의 전쟁지속은 국가재정에 무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당시 전쟁을 지켜보던 유럽열강들은 러시아가 국력을 소모한 것은 환영했지만, 
이들이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제정 러시아가 패배할 경우 국내혁명을 자극시켜 혁명의 움직임이 독일까지 번질상황을 염려하고 있었으며 
프랑스는 러시아의 국력소진과 패배가 유럽의 세력균형을 무너뜨려 
독일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질것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승리를 거둘 경우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세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자신들의 국익을 침해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일본을 지원해줬던것은 러시아와 일본의 힘이 균형을 잃어 서로를 견제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지 
일본이 승리를 거두길 원한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러시아의 본토를 점령했던것도 아니었고 러시아는 항복을 거부하고 전쟁을 이어가기를 끊임없이 천명하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일본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도 
상대적 손실은 러시아의 손실을 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일본의 수뇌부는 동아시아에서의 이해관계가 가장적은 열강인 미국과 접촉하여 중재를 요청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1년이 넘도록 진행된 러일전쟁은 미국의 중재를 바탕으로 포츠머스강화조약을 통해 간신히 종결될수 있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로서 일본은 사할린섬을 러시아로부터 할량받게 되었으며 
러시아는 만주지역에서 군사를 철수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인정받아 조선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1910년 조선병합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러일전쟁동안 국가예산의 4배에 달하는 약 20억엔을 소모했던 일본은 
러시아의 거부로 인해 조약에서 제대로된 배상금을 얻어내지 못했으며 이로인해 내부적인 반발을 겪기도 했습니다. 
제정 러시아에서는 전쟁의 패배 이후 그동안 쌓여왔던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러시아의 약화는 유럽에서 독일제국의 팽창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강대국의 일원으로서 온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렇게 일본은 다른열강들의 용인하에 동아시아에서 지속적인 팽창을 이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20세기초의 국제정치는 점점 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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