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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이야기

해외감동사연 아이와 함께 한국병원갔던 프랑스 엄마의 한국 정착 스토리

by 웨더맨 2024.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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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감동사연  아이와 함께 한국병원갔던 프랑스 엄마의 한국 정착 스토리

저는 프랑스 동남구 해안가 주변에 위치한 
모나코라는 공국에서 온 카밀라라고 합니다. 
저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란 뼈속부터 프랑스인인데요. 

프랑스 대학으로 유학을 온 
모나코 출신의 남편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면서 모나코로 건너가 살게 되었습니다. 
또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과의 사이에서 사랑스러운 아들까지 얻었죠. 

아들이 태어났을 때는 
세상을 모두 얻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않아 
저희 부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바로 아이의 신장에 문제가 있다. 
저희는 의사에게 아이의 몸이 
정상으로 회복될 가능성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가능성이 없는건 아니지만, 
매우 희박합니다라고 대답했었죠. 
아주 적은 확률이었지만 저희 부모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나코에 있는 모든 병원을 돌아다녔고 
제 고향인 프랑스로 건너왔습니다. 
들어가서 좋은의사라 이름난 사람들은 전부 만나봤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어요. 
어떤 의사도 아이에게 딱 맞는 좋은 치료법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유럽국가의 병원비는 상상이상이에요. 
아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저는 일을 그만뒀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다니는데 집중했죠. 
당연히 소득은 줄었고 3가족의 생활비와 아이의 
병원비를 버는것은 온전히 남편의 몫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어요. 

그리고 아이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인생의 3분의 2 이상을 병원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편을 찾아갔을 때 
남편의 숨은 이미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오랜만에 본 남편의 얼굴은 매우 야위어 있었어요. 
저는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된 이유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일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편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참 아파요 
남편을 그렇게 보냈지만 저에게는 슬퍼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남편이 선물로 주고간 아이가 있었으니까요. 
제가 살던 모나코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작은 나라입니다. 
인구도 3만명에 불과하죠. 
GDP는 64억 달러로 세계148위 정도이기는 하지만 
1인당 GDP는 16만 6000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기후도 온화해서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목적으로 찾아오고 
실제로 관광수입이 굉장히 높은 나라인데요. 
이때문에 모나코는 살기 좋은 나라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수치들은 저와 연관이 없는 것들이었어요. 
남편도 세상을 떠났고 저는 직장을 그만둔지 오래였죠 
돈을 버는 족족병원비를 쓴 탓에 모아둔 돈도 없었습니다. 

나라에서 지원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어요. 
결국 저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때부터는 생존의 문제였어요. 
아이의 병을 낫게 하기위해 일을 하는 것을 넘어서 
저와 아이가 굶어죽지않게 발버둥쳐야 했죠.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남편과의 
추억이 깃든 모나코를 떠났습니다. 
프랑스에는 부모님이 계시니까 
아이를 두 분에게 맡기고 일을 할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한가지 걱정스러웠던 것은 제 부모님이 
제 생각처럼 저희를 반겨주실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희 집안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거든요. 
프랑스에 도착해서 부모님에게 저와 아이의 상황을 말씀드렸을 때 
제 우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개인주의가 얼마나 심한지는 
프랑스 사람으로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부모님마저 그러실 줄은 몰랐어요. 
저는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제가 프랑스를 떠나야 함을 확신했습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제가 일을 가는 시간에 
아이를 돌봐주는 일은 1년 
딱1년만 해주시면, 상황을 모두 정리해서 
떠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일과 아이의 감별 동시에 하고 차도가 없으면 
다른 병원을 찾아가며 1년뒤 프랑스를 떠날 준비를 함께 
진행하다 보니 너무 지치더군요. 
아이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세상을 등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남편과 아이를 생각하고 버텼어요. 
그런데 저를 더 힘들게 한 건 체력적인 한계가 아니었습니다. 

아이의 상태가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던 것이었어요. 
부모님에게 약속했던 1년이 지났고 
이젠 어디로 떠나야 할지를 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느 나라로 가야 할지 정할 때 
고려했던 1순위는 의료체계가 잘 구축되어 있는가였고 
이 순위는 아이가 살기 좋은 나라인가였어요. 
아이의 건강이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기 때문에 
의료체계를 보는 것은 당연했고 
아이가 살기 좋은 나라인지가 중요했던 일 이유는 
아이가 나이를 먹으며 성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보냈던 아이는 
평범한 또래 아이들의 삶을 너무나 부러워했어요. 
병실 안에서 보는 풍경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아이를 보니 가슴이 찢어지듯 아프 아프더군요. 
그래서 저는 아이가 병마에게 눌려 마땅히 
행복해야할 어린 시절을 우울하게 보내지 않도록 
아이가 살기좋은 나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검색도 하고 책도읽고 주변 사람들에게 우선순위들을 말하니 
모두가 입을 모아 스위스를 이야기 하더라고요. 

스위스는 세계에서 살기 좋은 나라 5위였고 
제게 익숙한 유럽에 속해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저는 스위스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어린시절을 보냈던 모나코는 
앞서 말했듯 세계에서 두번째로 작고 인구도 3만명에 불과했지만, 
그런데 스위스는 달랐어요. 인구는 885만명이 넘었죠. 
모나코의 295배 규모였습니다. 
또 자연 경관이 얼마나 웅장한지 저와 아이는 
스위스의 풍경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바라보 스위스의 풍경을 본 아이의 표정에는 
경이로움이 묻어나 있었고, 저는 아이와 함께 스위스에 오기로 
결정한 것이 제 인생의 가장 훌륭한 결정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 마음은 얼마가지 못했습니다. 
스위스 병원에 진료비 내역서가 나왔거든요. 
저는 진료비 내역서를 보고 눈만 껌뻑껌벅 감았다. 떴습니다. 
제 눈으로 보는 숫자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거든요. 
아이가 병원에서 특별히 대단한 치료를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스위스의 환경이 너무 좋아서인지 스위스에 도착하고 나서 
아이의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었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검사를 받고 검사를 위해 
며칠간의 입원을 한게 다였어요. 
퇴원을 해도 좋다는 의사의 말에 잠깐 집으로 돌아왔다가 
정기검진을 위해 똑같이 잠깐의 입원검사를 한게 다였습니다. 
스위스 병원의 병원비는 같은 처치를 했던 프랑스와 비교해서 
10배 가량 높았어요. 물론 프랑스에 비해 
의료체계가 훨씬 잘 짜여 있었고, 의사들의 실력 또한 
월등히 좋았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처치에 이런 금액이 나온다는 건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아이와 함께 병원을 다니면서 
저도 어느정도 병원비에 대한 감각이 생겼거든요. 
부끄럽지만 저는 그제야 스위스의 살벌한 물가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집 렌트비 차 렌트비 식비 외 생필품의 가격 등 
스위스는 외국인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저는 프랑스처럼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스위스에서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머물기로 생각하고 준비했던 곳에서 
어떻게 한순간에 벗어날 수 있겠어요. 
이리저리 정리할 것들도 많았고 
무엇보다 다른 곳으로 다시 떠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불리는 모나코 
선진국 계열에 속해 있는 프랑스 
세계 가장 살기 좋은 나라 5위인 스위스에서도 적응하지 못한 
제가 이보다 더 나은 나라를 선택할 수 있을지 
그것 또한 고민이 되었죠. 
제가 가지고 있던 걱정은 이윽고 두려움이 되어 
저를 서서히 잡아먹어 갔습니다. 
우울증에 시달리며 스위스를 떠날준비를 하고 있는데, 
제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는건 다른 곳으로 
또 떠나야 한다는 현실이 아니었어요. 
그토록 좋아했던 나라를 떠나야 한다는데도 싫다는 소리 
한번 못하는 아이의 모습이었죠. 
저는 아예 아이를 위해서라도 정착할 나라를 찾아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스위스의 살벌한 병원비를 대기에는 
제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어요. 
그래서 아이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지금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죠. 

 


이 문제로 간호사와 상의를 하고 있는데, 
간호사가 제게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지금 아이의 상태를 보면 정착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치료가 우선인 것 같아요. 
치료에 전념해서 아이의 상태가 나아지면 
이후에 정착할 곳을 찾는 게 어떨까요? 
저는 간호사의 이야기를 듣고 추천해 줄 나라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간호사는 주저하며 한 나라의 이름을 말했어요. 
저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이름을 들어는 봤지만 어떤 나라인지 배경 지식이 전혀 없는 곳이었거든요. 
지금 어느 나라를 말씀하신 거죠. 
간호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한국이요. 저는 간호사에게 왜 나라를 추천하는지 물었습니다. 
메디컬 코리아 라는 말이 있어요. 
의료 쪽으로는 최고 수준을 가지고 있는 나라죠 
저는 의아해하며 말했습니다. 
스위스도 유럽에서는 의료쪽으로 손꼽히는 나라고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 서비스는 미국 아닌가요 
제 물음의 간호사는 자신은 추천을 해줄 뿐 
결정은 제 몫이라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래도 제 말을 한번 믿어보세요. 

모두가 입을 모아 최고라고 말하는데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저는 곧장 돌아가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대해 알아볼수록 분노가 생겼어요. 
간호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에게 이런 나라를 
소개해준건가 화가 났죠. 
한국은 전쟁중인 나라였습니다. 게다가 세계에서 살기좋은 나라 23위밖에 안됐죠 
살기 좋은 나라 5위인 스위스도 떠나는 마당에 
23위라니 못해도 10위권안은 소개해줘야 하는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중인 나라가 어떻게 의료 수준이 높겠어요. 
또 전쟁 중인 나라에 투자할 미친사람들이 있을리 없으니 
한국의 경제 상황도 안봐도 뻔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한국전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마친지도 얼마 안됐더라고요. 
한 나라가 전쟁을 복구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교육을 통해 배웠던 터라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습니다. 

당연히 한국은 제 머릿속에서 지워졌고 
저는 어느 나라도 결정하지 못한채 발만 동동거리며 시간만 보냈어요. 
그러던 중 아주 우연히 한국에서 온 유학생을 만났습니다. 
굉장히 깔끔했고 젠틀했으며 게다가 유식했죠. 
제 기준 아시아 선진국은 일본이었기 때문에 
저는 그 사람이 당연히 일본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람은 한국인이었어요. 
저는 제가 한국에 대해 많은걸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고 
한국행을 결정했습니다. 
물론 비행기 속에서도 불안한 마음이 한가득이었어요. 
직접 본게 아니었으니까요? 그 사람이 상위 1%인 사람이라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생활방식을 모를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죠. 

프랑스는 빈부격차가 정말 큰 사회 문제거든요. 
지푸라기라도 잡은심정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는 했지만, 
너무나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빠져나왔을 때 저는 제가 비행기를 잘못 내린 줄 알았어요. 
한국의 공항은 너무나 깨끗했고 쾌적했습니다. 
향기까지 나는 것 같더라고. 
유럽에 있는 공항을 가면 사람에게서 나는 특유의 채취 때문에 
힘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한국은 달랐습니다. 

급하게 잡은 숙소를 가면서 보이는 건물들은 
너무나 세련됐고 도로는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으며 
길가에서는 노숙자와 약을 한 사람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골목골목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였어요. 
길가에는 쓰레기가 없었고 사람들은 청결한 모습이었죠. 
건물이 세련된 만큼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생김새도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급하게 잡은 숙소였음에도 청결했고 
머리카락이 하나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직원은 
선뜻 방을 바꿔주기도 했죠. 
게다가 제가 아이와 함께 있는것을 보고는 
아이를 위한 간식거리도 개인적으로 챙겨주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유료라고 생각하고 돈을 건네려는데 
직원은 손을 거세게 흔들며 이렇게 말했어요. 아닙니다. 
아이가 오랜 비행으로 피곤해 보여서 챙겨준 것 뿐이에요. 
아이에게 이 정도는 당연하죠. 
부디 편하게 쉬다 돌아가세요. 

5성급 호텔도 아니고 길가에 널려있는 숙소에서 
이런 대접을 받다니 한국에서 첫날은 
지금까지 거쳐온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새벽부터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다음날에는 몸을 일으키기 
힘들정도의 심각한 독감이 찾아온 것이었어요. 
저는 힘겹게 숙소 직원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연락을 받은 사람은 어제의 친절한 직원이 아니었어요. 
저는 이 사람이 저를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이 사람마저 너무나 친절했습니다. 
제 상태를 자세히 묻고는 가장 가까운 병원의 주소를 찾아 
심지어 제가 병원에 다녀오는 동안 
아이를 돌봐주겠다는 얘기까지 했습니다. 
그건 아닌 듯해서 아이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움직이기 힘든 저를 위해 아이의 외출준비까지 도와주었죠. 

저를 낳아준 프랑스 부모님도 제 아이를 돌보는걸 
꺼려했는데 생전 처음 본 사람이 저와 아이를 살뜰히 
챙겨주는 것을 보며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이 또 하나 생겼습니다. 
저는 직원이 잡아준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입을 떡 벌린 채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어요. 
가장 가까운 병원이었고 도심 한가운데 있는 곳도 아니었는데 
병원이 너무나 청결했던 것이죠. 

내부 인테리어는 잡지에서나 나올 것처럼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어요. 
이렇게 대단한 병원이라면 병원비도 많이 나올 것 같았거든요. 
아이 병원비도 벅찬데 
저에게까지 그렇게 큰 비용을 쓰는게 아까웠습니다. 
의사와의 면담을 마치고 저는 처방에 따라 주사를 맞았어요. 
주사를 맞는데 심장이 떨리더라구요. 
병원비가 대체 얼마나 나올지 감도 안 잡혔습니다.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수납 창구에 갔고 
직원이 얘기하는 금액을 재차 확인했습니다. 
얼마라고요. 4만 원입니다. 
저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하며 얘기했어요. 
다시 얘기해 주세요. 제가 잘못 이해했나 봐요. 
4만 원이요. 얼마라고요. 4만 원이요. 
직원은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걸로도 모자라 
종이에 친절히 글자를 적어주었습니다. 

제가 카드로 결제를 했고 
정말 4만 원이 청구되었어요. 
저는 제가 맞은 주사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주사를 맞고 병원을 나선 즉시 
몸의 상태가 호전되었고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며칠 먹으니 완전히 나았습니다. 
저는 믿을 수 없었어요. 제가 거쳤던 세 나라에서는 
의사와 눈만 마주쳐도 50달러가 나갑니다. 
한국 돈으로 거의 7만원 수준이죠. 
거기에 주사까지 맞았다면 15만 200달러는 순식간인데 
이것도 한국 돈으론 1억 9000 가까이 되는 돈이에요. 

또 의사를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아침 일찍가도 몇시간이나 대기해야 하고 
운이 안좋으면 그날의 진료를 못 받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아프면 약을 먹는것도 아니고 
차를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병원비는 다를거라 생각했어요. 
그 병원이 특별히 저렴하거나 
외국인인 제가 앓는모습이 불쌍해서 적은 병원비를 
받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스위스간호사가 소개해준 한국의 대형병원을 가려고 하는데 
한가지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내리면 병원의 셔틀버스가 
무료로 저희를 병원코앞까지 데려다준다는 것이었죠. 

지하철은 또 얼마나 깨끗한지 담배 피우는 사람도 없고 
구걸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지하철 타는건 꿈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은 달랐습니다. 
또 스크린 도어라는 것이 있던데 너무 안전해 보이더라고요. 
긴장하지 않고 지하철을 탄건 한국이 처음이었습니다. 
게다가 길을 찾는것도 쉬워서 
출구에도 쉽게 도착할 수 있었어요. 
병원 셔틀버스의 표지판도 
커다랗게 표시되어 있었죠. 

또 한가지 놀라운 건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서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럽국가에서는 새치기가 너무나 흔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줄이 있는지 모르고 앞까지 
걸어가던 사람이 줄이 있는걸 알고는 
깜짝 놀라 맨끝으로 돌아가더라고요. 

한국의 시민의식을 느끼며 
저는 아이와 함께 셔틀버스를 기다렸습니다.
한국인들의 도덕성과 양심을 지켜본 아이에게도 
귀감이 되는 훌륭한 모습이었죠. 
병원 셔틀버스가 도착한 뒤에도 놀라운 일이 계속됐습니다. 

셔틀버스 기사가 직접내려 사람들을 천천히 안으로 들여보내고 
차가 꽉차 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양해를 구하며 
다음 셔틀버스의 시간을 알려주었습니다. 
솔직히 무료로 운행하는 버스인데 
조금 불친절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살던 나라들은 다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은 달랐습니다. 
병원에 도착해서 만난 모든사람들도 친절했죠. 
하지만 친절함과 의료시스템은 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사와의 진료에서 의사는 지금까지 들었던 
이야기와 똑같은 말을 했어요. 
저는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습니다. 
여기도 결국 똑같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그때 의사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재 한국 의료진들이 연구한 치료방식을 적용해 보면 
어떻겠냐는 것이죠. 이미 임상실험까지 마쳐서 위험성은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면서요 
우울증까지 찾아온 제 어두운 마음의 
한줄기 빛이 내리는 듯했습니다. 
의사는 곧장 아이를 입원시켰고 
치료 계획을 알려주었어요. 

입원을 해서 느낀 또 다른 놀라움은 식사였습니다. 
유럽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다양한 메뉴가 있었고, 
저는 채소로 그렇게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게 입원과 치료가 병행됐고 아이의 상태는 나날이 좋아졌어요.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회복 속도였죠 
그리고 대망의 병원비 수납일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한 상태로 청구서를 봤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어요. 
그리고 직원에게 달려가 청구서를 들이밀었죠. 
금액이 잘못 청구된 것 같아요. 빨리 제대로 된 청구서를 주세요. 
직원은 청구서를 살펴보더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흥분한 상태로 말을 이었어요. 이게 진짜 금액이라고요. 
거짓말 하지 마세요. 이래놓고 나중에 청구서 폭탄을 보내려는 거죠. 
직원은 당황했는지 저를 진정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참을 수 없었어요. 
투명하게 병원비를 공개하지 않는건 무슨 의도죠 
직원은 자신의 상사까지 불러야 했고 
저는 오랜 설명끝에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흥분했던 이유는 한국의 병원비가 
프랑스 스위스의 10분의 1에 불과했기 때문이었어요. 
여러분이라면 믿을 수 있나요? 지금까지 호전된적 없던 
건강이 나날이 좋아져 가지고 있는데, 
별 성과를 내지 못했던 병원들보다 병원비가 10분의 1이나 
저렴하다는 것을요 저는 스위스 간호사가 말했던 
한국의 의료가 이정도 수준이라는 것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한국이 전쟁중인 국가였으며 
제가 무시했던 나라였다는걸 기억해 냈어요. 
직접 한국의 놀라운 생활수준을 본 뒤에는 
아예 잊고 살았거든요.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저는 의사에게 아이의 질병이 완치되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애당초 치료될 확률이 매우 낮다던 
프랑스 스위스의 의사들과 달리 
한국의 의사들은 치료확률을 매우 높게 잡고 있었거든요. 
아이는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있지만 
한번도 병이 재발된 적이 없습니다. 

저는 한번도 고려해 본적 없던 나라인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어요. 
아이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겠다는 
다짐도 한국에서 실현할 수 있게 되었죠. 
아이들이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학교에 
걸어갈 수 있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이 정도로 한국의 치안은 안전했고 
볼거리 즐길거리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선진적인 IT 기술등을 갖추고 있었기에 
이 나라를 떠나는건 손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의 저는 아이와 함께 한국으로 이민을 오기로 결정한 상황입니다. 
아이의 목숨을 살려주고 동시에 제 삶도 구원해주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고 싶어졌거든요. 
저와 아이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해준 한국 정말 사랑합니다.

오늘은 남편을 잃고 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여러 나라를 거치다 결국 한국까지 오게 되었던 
카밀라 씨의 한국 경험담을 담은 사연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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